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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부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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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키 부키치는 일본의 정치가로, 1884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서 태어나 1956년 사망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은행에서 근무하다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917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헌정회, 입헌민정당, 자유당, 일본민주당 등 여러 정당에서 활동하며 '야유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게이세이 전차 의혹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공직 추방을 당하기도 했으나, 정계에 복귀하여 요시다 시게루 내각 타도에 힘썼다. 이후 보수합동에 참여하여 자유민주당 창당에 기여했으나,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재치 있는 언변과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했으며, 파벌 정치와 권모술수의 한계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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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부키치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미키 부키치의 초상 사진
미키 부키치의 초상 사진 (1953년 촬영)
본명미키 부키치
출생일1884년 8월 15일
출생지일본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사망일1956년 7월 4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메구로구
국적일본
배우자미키 가네코
직업변호사
학력도쿄 전문학교 졸업
정치 경력
소속 정당헌정회입헌민정당→무소속→익찬정치회→무소속→대일본정치회→일본자유당→민주자유당→자유당→일본자유당→일본민주당자유민주당
직위중의원 의원
선거구(도쿄부 도쿄 시구→) (도쿄부 제11구→) (도쿄부 제1구→) (구 가가와 1구→) ( 가가와 전현구→) 구 가가와 1구
당선 횟수11회
임기 시작1917년 4월 22일 - 1934년 3월 26일, 1942년 5월 1일 - 1945년 12월 18일, 1946년 4월 11일 - 1946년 6월 22일, 1952년 10월 2일 - 1956년 7월 4일
기타 직책 1자유민주당 총재 대행 위원
임기 시작 11955년 11월 15일
임기 종료 11956년 4월 5일
기타 직책 2초대 일본자유당 최고 고문
임기 시작 21953년
임기 종료 21954년
훈장
훈장 정보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2. 생애

미키 부키치는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서 골동품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카마쓰 중학교 재학 중 우동 무전취식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도지샤 중학교로 전학 갔으나 싸움에 휘말려 또 퇴학당했다. 호시 도루의 도움으로 도쿄로 상경했으나, 1901년 호시가 암살당했다.

1902년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훗날 아내가 되는 아마노 가네코를 만났다. 1904년 졸업 후 잠시 와세다 대학 도서관에서 필경사로 일했다.[2] 1905년 일본 은행에 입사했으나,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가쓰라 타로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여 해고되었다. 1907년 사법 고시에 합격하여 도쿄 지방 법원 보조 사법관으로 임명되었지만, 7개월 만에 변호사가 되었다. 같은 해 아마노 가네코와 결혼했다.

1913년 도쿄 우시고메 구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7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정부 비판으로 '야유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보통 선거 도입을 주장하며 도코나미 다케지로와 논쟁을 벌여 하마구치 오사치의 눈에 띄었다. 1920년 시베리아 출병 조사 위원으로 시베리아를 방문하여 일본군 개입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3] 1922년 도쿄 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시정 정화를 주장하며 입헌 정우회와 대립했다.

1924년 헌정회 사무총장으로 승진하여 총선에서 당을 승리로 이끌었고,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재무 대신이 된 하마구치의 지도 아래 재무성 정무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입헌 민정당에 합류하여 유럽 순방을 떠났다. 1928년 게이세이 철도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정계를 떠났다.

1939년 호치 신문사 사장이 되었고, 1942년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일본의 항복 후 자유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1년 공직 추방 해제 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를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1953년 요시다의 "바보" 발언을 계기로 징계 조치를 통과시키고,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켜 요시다 내각을 붕괴시켰다. 이후 민주당 창당을 주도하여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을 탄생시켰다.

1955년 좌우파로 분열된 사회당의 통합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끼고, 자유당과의 보수합동을 추진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위암으로 사망했다.

2. 1. 정계 입문 전 (1884년 ~ 1913년)

1884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에서 골동품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카마쓰 중학교 2학년 때 우동을 무전취식한 사건을 주모했다 하여 퇴학당했다.[14] 교토의 도지샤 중학교로 전학갔지만 난투극을 일으켜 또 퇴학당했다.[14] 이후 호시 도루에게 의탁해 그의 법률사무소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그러던 중 1901년 6월 호시가 암살당했다.[14]

그 후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미키는 신주쿠에서 호색 행위를 일삼으며 밤을 지새우는 한편 야구와 법률 공부에 열중했다.[14] 훗날 와세다 대학 야구부로 발전하는 치어풀 구락부에 입부했는데 솜씨가 제법 좋았다고 한다(다만 현재 대학 야구부의 공식 문서에는 미키의 이름이 없다).[1] 훗날 아내가 되는 아마노 가네코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04년 도쿄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학교 도서관에 단기 채용되어 사자생으로 일했다.[2]

1905년 일본은행에 입사해 모지시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포츠머스 조약에 반대하는 정부 탄핵 연설회에 참여해 제1차 가쓰라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다 하여 복무규정 위반으로 면직됐다.[14] 1907년 판검사 등용 시험에 합격해 도쿄 지방 재판소 사법관 시보로 발령받았지만 월급쟁이가 성미에 맞지 않아 7개월 만에 사직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같은 해 가네코와 결혼했다.[14]

2. 2. 헌정회 · 입헌민정당 시절 (1916년 ~ 1934년)

1913년 도쿄시 우시고메구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년 뒤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16년 헌정회에 입당했고, 1917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했다.

미키는 날카로운 언변으로 정부를 비판하여 '야유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0년 6월,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상이 국회에서 해군 예산을 설명하면서 "육해군 모두 어려움을 극복해 장기 계획을 세워 육군은 10년, 해군은 8년…"이라고 말할 때 미키가 갑자기 "달마는 9년!"이라고 소리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는 중국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바라본 채 선좌하여 깨달음을 얻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편, 보통 선거 도입을 주장하며 내무대신 도코나미 다케지로와 논쟁을 벌였는데, 이를 통해 하마구치 오사치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후 하마구치는 미키의 정치적 멘토가 되었다.

1920년 시베리아 출병을 조사하기 위해 제국의회가 파견한 조사단에 참여하여 1개월 정도 시베리아를 시찰했다. 시찰 이후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와 하마구치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3] 1922년 6월 도쿄시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시의원으로서 도쿄시정 정화를 주장하며 시정 혁신 동맹을 결성해 입헌정우회 소속 의원들이 결성한 친교회와 대결했다. 훗날 동지가 되는 하토야마 이치로가 당시 친교회 멤버였다.

1924년 1월, 39세의 나이로 헌정회 간사장에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총선에서 헌정회를 원내 1당으로 만들었다. 6월, 헌정회, 정우회, 혁신구락부 등 호헌 3파가 힘을 모아 가토 다카아키 내각을 구성했다. 대장상이 된 하마구치는 미키를 대장참여관으로 임명했다. 1927년에는 하마구치를 대표로 하여 입헌민정당이 창당되자 참여했으며, 이후 유럽 시찰에 나섰다.

1928년 게이세이 전차 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1931년 1심에서 징역 4월을 선고받았다. 미키는 "합법적이지 못한 판결에 불만이다. 무죄를 확신하므로 무죄가 나올 때까지 싸우겠다"라며 항소했고,[17] 2심에서 징역 3월로 감형받았다. 미키는 상고했지만 대심원은 1934년 상고를 기각해 징역 3월이 확정되었고, 미키는 정계를 떠나야 했다.[18] 이때 정5위를 잃고,[19] 훈4등·제1회 국세 조사 기념장·대례 기념장(쇼와)을 박탈당했다.[20]

2. 3. 정계 복귀와 공직 추방 (1939년 ~ 1951년)

1939년, 미키 부키치는 호치 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1] 1942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비추천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1] 이 선거에서 하토야마 이치로도 비추천으로 당선되었는데, 미키는 입헌 민정당, 하토야마는 입헌 정우회 출신으로 원래 정적이었다.[1] 하지만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군부에 저항하는 자유주의 정당인으로 행동을 함께하며 '하토야마가 총리대신, 미키가 중의원 의장'이 되자며 의기투합했다.[1] 같은 해 8월, 호치 신문사는 요미우리 신문에 인수되었다.[1]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미키는 일본자유당 창당에 참여했다.[1] 1946년 4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원내 1당이 되자 하토야마는 조각을 시도했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하토야마를 공직 추방하면서 조각은 무산되었다.[1] 하토야마 대신 요시다 시게루가 자유당 총재가 되어 제1차 요시다 내각을 구성했다.[1]

외교관 출신인 요시다는 전전에 군부에 저항하지 못하던 정당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1] 그래서 주요 인사를 간사장 고노 이치로와 총무회장 미키 등 주요 당직자와 상담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처리했다.[1] 격앙된 당 집행부는 요시다를 제명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지만, 미키는 이대로 요시다를 제명하면 일본사회당이 어부지리로 정권을 차지할 거라며 당내 분란을 막아세웠다.[1]

1946년 5월 24일, 미키도 하토야마에 이어 공직 추방을 당했다.[1] 다시 한 번 정계를 떠난 미키는 다카마쓰시에 돌아갔는데 시내에 있던 저택이 전쟁통에 소실된 것을 알았다.[1] 미리 고향에 내려가 있던 가족들이 있는 호텔에 가서 호텔을 통째로 구매했다.[1] 이후 공직 추방이 해제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1]

2. 4. 요시다 내각 타도와 하토야마 내각 탄생 (1951년 ~ 1955년)

1951년 공직 추방에서 해제된 미키 부키치는 하토야마 이치로, 고노 이치로 등과 함께 요시다 시게루 타도를 목표로 했다. 이들은 자유당에 복당했지만, 당은 이미 요시다의 측근 세력인 요시다 학교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다. 하토야마에게 총재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약속도 사실상 파기되면서, 미키 등은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하지만 하토야마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신당 창당은 좌절되었고, 미키는 자유당 내에서 반(反) 요시다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미키는 요시다 내각을 흔들기 위해 여러 가지 계책을 냈다. 요시다가 자신의 후계자로 오가타 다케토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히로카와 고젠이 요시다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히로카와를 간사장으로, 미키 자신을 총무회장으로 하는 인사안을 제시하여 요시다를 압박했다. 이는 요시다가 받아들이면 미키가 히로카와를 통해 당을 장악하고, 거부하면 히로카와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어느 쪽이든 요시다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5] 결국 히로카와는 간사장이 되지 못했고, 요시다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1953년 2월 28일, 요시다가 국회에서 사회당 우파 의원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질문에 "바보 자식"이라고 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키는 사회당 우파의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비밀리에 만나 내각 불신임 결의안 대신 총리대신 징벌동의안을 제출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오아사 다다오, 마쓰무라 겐조 등과 사전에 협의하고, 히로카와 파 30여 명이 본회의에 결석하도록 하여 징벌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미키는 야당을 설득하여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요시다에게 퇴진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시다는 거부했고, 민주화 동맹 22명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3월 14일, 중의원은 찬성 229표, 반대 218표로 불신임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히로카와 등 16명도 자유당을 탈당하여 일본자유당을 결성했다. 이른바 '바카야로 해산'이었다.

총선 결과, 자유당은 199석을 얻어 제1당을 유지했지만, 탈당파들의 일본자유당은 35석에 그쳤다. 이후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회담을 통해 하토야마 파 대부분은 자유당에 복당했지만, 미키 등 8명은 일본자유당에 잔류했다. 이들은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 빗대 '8인의 사무라이'로 불렸다.

1954년 1월, 조선 의옥 사건이 발생하여 자유당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와 정무조사회장 이케다 하야토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키는 이 기회를 틈타 개진당의 오아사, 미키 다케오, 자유당의 하토야마,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반(反) 요시다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11월, 일본민주당이 창당되어 하토야마가 총재, 기시가 간사장, 미키가 총무회장이 되었다.

결국 요시다 내각은 총사퇴했고,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했다. 미키는 '하토야마 총리, 미키 중의원 의장'이라는 오랜 꿈의 절반을 이루었지만, 총선 직후 중의원 의장 선거에서 야당의 반대로 실패했다.

2. 5. 보수합동과 사망 (1955년 ~ 1956년)

1955년 4월 13일, 미키는 보수 정당 결집을 추진하며 하토야마 내각이 장애물이 된다면 내각이 총사직해도 좋다고 발언했다. 당시 좌우파로 분열되어 있던 사회당이 통합하는 분위기가 되자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암 진단을 받아 여명이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도 받았기에 마음이 조급했다. 미키는 당내 합의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자유당에 공작을 개시했다.

보수합동을 위한 회합에 참여한 민주당과 자유당의 간부들. 왼쪽부터 오노 반보쿠, 미키 부키치, 기시 노부스케, 이시이 미쓰지로.


1955년 5월 15일 자유당 총무회장 오노 반보쿠와 회담했다. 오노는 전전부터 하토야마의 측근이었지만 본래 정적이던 미키가 하토야마와 가까워지면서 오노는 설 자리를 잃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오노는 미키를 싫어했지만 미키는 교묘하게 오노를 설득했고 결국 보수합동에 찬성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기시, 미키, 이시이 미쓰지로, 오노 등 네 명이 모여 일본민주당과 자유당의 통합을 위한 회담을 했다. 민주당 내에서 미키 다케오마쓰무라 겐조 등이 반대하는 등 난항을 거듭했지만 하토야마가 직접 내각총사직을 언급하면서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다.

문제는 누가 초대 총재가 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민주당과 자유당은 평행선을 달렸고 결국 총재를 공석으로 둔 채 총재대행위원을 두고 합당 후에 선거로 총재를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일본 최초의 보수합동이 성사되어 자유민주당이 만들어졌다. 미키, 하토야마, 오가타 다케토라, 오노가 총재대행위원이 되었으며 5개월 뒤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하토야마가 총재로 당선됐다. 미키는 "(총리대신인) 하토야마 다음은 오가타, 기시, 이케다 하야토, 여기까진 예상이 간다"라고 평했다. 다만 자민당이 워낙 복잡한 관계 속에서 탄생했기에 10년 버티면 오래 간 것일 거라는 얘기도 많았다.

미키의 장례식.


1956년 4월 병세가 악화됐고 7월 도쿄도 메구로구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1세로 사인은 위암이었다.[24] 사후에 훈1등 욱일대수장정3위가 추서됐다.[25]

3. 정치적 유산과 평가

미키 부키치는 일본 정당 정치 발전에 기여했지만, 파벌 정치와 권모술수의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1955년 보수합동을 주도하여 55년 체제 성립에 기여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권모술수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6][7]

3. 1. 긍정적 평가

뛰어난 정치 감각과 협상 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의 중요한 고비마다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55년 보수합동을 주도하여 55년 체제 성립에 기여함으로써 일본 정치 안정화에 이바지했다.[6][7]

미키는 좌파 사회당과 우파 사회당의 통합을 우려하여 우익 정당들에게 단결을 호소했다. 민주당 내에서 합의를 모색하는 동시에 자유당 내에서도 활동을 벌였다. 특히 자유당의 오노 반보쿠하토야마 이치로의 측근이었지만 미키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과거 하토야마의 정치적 적이었기에 미키를 증오했음에도 불구하고, 미키는 오노에게 애국심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설득해 그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유민주당 창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2. 부정적 평가

미키 부키치는 권모술수에 능하고 파벌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일본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6][7] 그는 민주주의 원칙보다는 권력 획득과 유지를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55년 보수합동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행보는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

미키는 좌파 사회당과 우파 사회당의 통합을 우려하여 우익 정당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는 자유당의 오노 반보쿠에게 애국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합당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미키는 자신의 정적이었던 오노를 교묘하게 설득하는 등 권모술수에 능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이 창당되었지만, 미키는 이 정당이 "2~3년 정도 유지되면 다행"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파벌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7] 이는 미키 자신이 권력 획득을 위해 파벌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일본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4. 일화

1913년 우시고메 구 의원에 당선된 미키 부키치는 이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16년 헌정회에 입당한 후, 1917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미키는 날카로운 언변으로 정부를 비판하여 '야유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20년 제43회 제국 의회에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이 해군 예산을 설명하던 중 "육군은 10년, 해군은 8년…"이라고 말하자, 미키는 "달마는 9년!"이라고 외쳤다.[9] 이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다카하시 대신의 별명인 '달마'를 이용한 재치 있는 야유였다. 이 일화는 그의 날카로운 언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보통 선거를 주장하며 도코나미 다케지로 내무대신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미키는 하마구치 오사치의 눈에 띄어 그의 정치적 멘토가 되었다.

1917년 총선에서 미키가 처음 당선되었을 때, 입헌정우회 후보 쓰보야 젠시로는 미키가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이에 미키는 "빚이 있는 후보는 바로 저, 미키 부키치입니다. 제가 가난하기 때문에 빚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오히려 빚의 상세 내역을 밝히며 재치 있게 응수했다.[8]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경쟁 후보가 미키에게 4명의 첩이 있다고 비난하자, 미키는 "첩이 4명 있다고 하는데, 사실은 5명입니다."라고 정정하며, "이 여성들은 모두 이제 노처녀가 되었고 더 이상 저에게 쓸모가 없습니다. 그래도 미키 부키치는 그들을 버리는 비인간적인 짓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 군중의 웃음과 찬성을 얻었다.[11] 그는 죽을 때까지 다섯 명의 첩을 두었지만, "내가 진정한 애정을 멈춘 적이 없는 사람은 확실히 아내 가네코입니다."라고 말한 애정 깊은 남편이기도 했다.[12]

도조 히데키 내각의 기업 재건 법안에 대한 당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나카노 세이고는 동맹통치회의 고위 간부들을 가리키며 "권력의 중심에 아첨꾼들만 모여 있군. 이것은 결국 우리나라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류 동맹통치회 의원들이 나카노를 야유하자, 미키는 갑자기 일어나 "시끄러워, 아첨꾼들아!"라고 외쳤고, 야유하던 사람들은 즉시 침묵했다.[10]

미키는 일본국유철도 시운마루 사고로 국철 총재가 사임하자, 소가와 신지에게 총재직을 맡도록 설득했다. 그는 망설이는 소가와에게 "조국이 부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일어서서 싸우려고조차 하지 않다니, 그렇게 불충한 사람이십니까?"라고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소고는 "저는 결코 배신자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총재직을 수락했다.[13]

5.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회차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15년 총선거12회무소속낙선
1917년 총선거13회도쿄부 도쿄시헌정회9위당선
1920년 총선거14회도쿄부 제11구헌정회1위당선
1924년 총선거15회도쿄부 제11구헌정회1위당선
1928년 총선거16회도쿄부 제1구입헌민정당3위당선
1930년 총선거17회도쿄부 제1구입헌민정당5위당선
1932년 총선거18회도쿄부 제1구입헌민정당3위당선
1942년 총선거21회가가와현 제1구무소속2위당선
1946년 총선거22회가가와현 전현구자유당3위당선
1952년 총선거25회가가와현 제1구자유당61370표28.2%1위당선
1953년 총선거26회가가와현 제1구자유당52797표25.6%1위당선
1955년 총선거27회가가와현 제1구일본민주당43632표20.5%3위당선


참조

[1] 서적 スポーツ人国記 Popura Shobo 1934
[2] 간행물 知られざる図書館員 三木武吉 http://www.wul.wased[...] 2010-03-15
[3]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4]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5] 서적 小説吉田学校 Ryudo Shuppan 1971
[6] 서적 The Hatoyama Dynasty: Japanese Political Leadership Through the Generations Palgrave Macmillan 2003
[7] 서적 Crisis and Compensation: Public Policy and Political Stability in Japan, 1949-1986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8]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9]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10]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11]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12] 서적 小説三木武吉 Kadokawa Shoten 1983
[13] 웹사이트 article on Shinji Sogo - Kogaku Shimbun International Foreign Students Association http://www.ifsa.jp/i[...]
[14] 서적 スポーツ人国記 ポプラ書房 1934
[15] 웹사이트 早稲田大学野球部史 https://dl.ndl.go.jp[...]
[16] 논문 知られざる図書館員 三木武吉 http://www.wul.wased[...] 早稲田大学図書館 2010-03-15
[17] 뉴스 懲役四月の三木武吉代議士は憤慨 東京朝日新聞 1931-10-01
[18] 웹사이트 「汚職のメッカ」東京市会で巻き起こった疑獄事件で明暗が分かれた政治家たち https://bunshun.jp/a[...]
[19] 간행물 官報 1934年5月26日 七〇二頁 https://dl.ndl.go.jp[...] 1934-05-26
[20] 간행물 官報 1934年7月3日 四四頁 https://dl.ndl.go.jp[...] 1934-07-03
[21] 뉴스 三木武吉が脱党、東京支部内の紛争で 大阪毎日新聞 1932-08-03
[22] 회의록 第2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21号 昭和23年5月8日 https://kokkai.ndl.g[...] 1948-05-08
[23]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2009-03
[24] Youtube 1956年ニュースハイライト(1956年(昭和31年) https://www.youtube.[...]
[25] 간행물 官報 1956-07-09
[26] 서적 三宅久之の書けなかった特ダネ 青春出版社 2010
[27] 문서
[28] 웹사이트 現代日本の源流 十河信二 http://www.ifsa.jp/i[...] 向学新聞 国際留学生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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